思索의 餘韻

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

하루살이.. 2010. 2. 2. 08:31

 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

김경주

한 번은 쓰다듬고
한 번은 쓸려 간다
검은 모래 해변에 쓸려 온 흰 고래
내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지갑엔 고래의 향유가 흘러 있고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표정은 아무도 없는 해변의 녹슨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씹어 먹던 사과의 맛
방 안에 누워 그대가 내 머리칼들을 쓸어내려 주면 손가락 사이로 파도 소리가 난다 나는 그대의 손바닥에 가라앉는 고래의 표정, 숨 쉬는 법을 처음 배우는 머리카락들, 해변에 누워 있는데 내가 지닌 가장 쓸쓸한 지갑에서 부드러운 고래 두 마리 흘러나온다 감은 눈이 감은 눈으로 와 서로의 눈을 비빈다 서로의 해안을 열고 들어가 물거품을 일으킨다
어떤 적요는
누군가의 음모마저도 사랑하고 싶다
그 깊은 음모에도 내 입술은 닿아 있어
이번 생은 머리칼을 지갑에 나누어 가지지만
마중 나가는 일에는
질식하지 않기로
해변으로 떠내려온 물색의 별자리가 휘고 있다


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. 어릴 때는 그런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더군요. 조금 더 살아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. 고개를 들면 밤하늘에 달이 보이니까 거기 달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칩시다. 그럼 구름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는 밤에 우리는 어떻게 달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까요? 아마도 해안선이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나니까. 그런 식으로 달의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이죠. 세상에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해요. 만약 볼 수 없는 사랑이 있다면, 그건 우리가 보지 못할 뿐. 그런 점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세심한 관찰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네요.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, 일리가 있는 것이죠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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